
10월 10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10월 10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사도신경
찬송 - 예수 사랑하심은 (찬411, 새563)

성경본문 요한계시록7:13-14
다윗을 보면, 말년에 무너지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골리앗 때문도 아니고, 집요하게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다윗이 무너진 것은, 더 이상 그의 인생에 골리앗이 없고, 사울이 없고, 압살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안정되고,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 다윗은 방심했고, 그 방심이 그를 무너지게 만든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골리앗은 절대로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골리앗 같은 존재가 있다면, 다르게 해석하면 인생에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다윗 같은 지도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이처럼 긴장하며 방심하지 않고 깨어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 말입니다.
‘지상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고, 천상교회는 승리하는 교회, 혹은 승리를 누리는 교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혼돈하면 안됩니다. 안주하고, 안정을 찾고, 대접을 받는, ‘좀 더 좋은 서비스’를 찾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조선이고, 전투선입니다. 영적으로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들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읽게 하신 것은,
1차 구독자인 초대교회 성도요,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 메시지입니다.
계시록 2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여기 나오는 ‘이기는 그’ ‘이기는 자’는 그 당시 통용되던 전투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소아시아 7교회 가운데 무려 5교회에게 이 전투적 용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그 당시 박해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까?
‘너희들이 받고 있는 지금 환난, 고통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더 멀리, 영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목표를 지향하라’
이 의미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깜짝 놀랄 일들이 계속 들려오고, 위기가 끊이지 않는 것 같고, 세속화, 변질의 말들이 자꾸만 들려온다면,
‘나는 아니니 괜찮아’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투 중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입니다.
13절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질문을 하고,
1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구원 받은 자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환난을 이긴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승리했다는 특징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7장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 나오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전투하는 교회를 전제로 하는 숫자로 해석합니다.
왜 그런가 하니,
민수기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군대 계수 기록을 자료로 하여 요한이 목적에 맞게 사용했다고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지상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방심하던 마음을 단속하고, 긴장을 회복하면,
마음에 담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내적으로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절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고린도전서 16장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더 강해져야 합니다.
‘강하라’ ‘담대하라’ 수없이 성경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교회가 너무 약한 것 아닙니까?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여러분, 교회에서 나오는 절반, 아니 70~80%의 소리는 ‘은혜가 넘칩니다’ ‘더욱 강건해 집니다’가 아니라,
‘아무개 집사가 상처 받았다’ ‘시험들었다’ ‘어느 교회 누가 또 실족했다’ ‘목회자가 또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이야기들 아닙니까?
냉정하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가 왜 이토록 상처를 주는 곳이 되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또 교회가 왜 이토록 상처를 받는 곳이 되었습니까? 역시 약해서 그렇습니다.
반면, 누군가 입에 담을 수 없을 말로 상처를 주며 비수를 꽂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저에게 일어나는 것이 다행입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강해서 그렇습니다.
‘그것 정도’로 넘겨 버릴 수 있는 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 상처 받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상처 받는 일들은 저를 빗겨가게 해주세요.’와 같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어떤 상처가 되는 일들이 오더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튼튼한 어깨를 주옵소서. 강한 종이 되게 해주세요.’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강함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강함은,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울이 이 말을 선포하기 위해 바로 앞 절에서 부연을 합니다.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살펴본다면, 숯불은 따뜻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그 사람을 품고, 결국에는 변화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라.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바로 사랑.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해진다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원수보다 상대적 강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밟아버리고, 그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해내는 능력. 끝까지 품는 능력,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강함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하시는 강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동성애의 문제, 이단의 문제, 우리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타협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선고하지 않으셨는데,
이미 우리는 그 영혼을, 그 인격을 판단하고 선고하고 있진 않습니까?
창녀와 세리까지 품으신 주님. 분명 주님께서도 그들이 행했던 행위, 죄의 문제에선 엄격하셨지만, 그 영혼은 품으셨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행위도 미워하고,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동일시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미운 행위를 하는 그들의 행위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되, 그 영혼은 품으라는 것.
얼마나 이중적 ‘도’입니까?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신비이고, 그 도를 따르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야 합니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진리에 입각해 비 진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엄중하게, 철저히 싸워야 하고, 동시에 그 사람들은 긍휼한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 분명 쉽지 않고, 아니 가능하지 않은 것 같지만,
주님께선 여러분들을 믿으시기에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여러분들이 먼저 믿은 이유입니다.
지금보다 더 강한 하나님 군사로 성숙에 이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외적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해야 합니다.
전쟁에서 치명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피아식별입니다.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6.25 전쟁 당시 피아식별을 하지 못해 전사한 군인들이 전체 전사한 군인들의 20%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있을까요?
세계 역사 가운데, 모든 전쟁이 비슷한 사례로 사망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당장 교회 안에도 얼마나 적을 지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보기 싫어도, 절대 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나와 다르고, 한 쪽이 미숙하거나, 모두 미숙하거나, 약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아가는데, 형 엘리압이 훼방을 놓는 것. 교회 안에 자중지란. 바로 이 모습 아닙니까?
이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야 하지만, 적과 아군은 구분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워도 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님께서 깨우침을 주셔서 미워했던 그 누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기적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기적을 사모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빌1장 15~17, 18절의 말씀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을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 상황이 교회 안에 미숙한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을 라이벌처럼 생각해서 바울을 곤욕에 빠뜨리려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바울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18절을 보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의 바울 됨.
이런 대범함입니다.
‘상관없다. 지금 나를 무너뜨리려고 그러는 것 알지만,
정말 아는 것은 적은 저 세상이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나는 기쁘고 또 기쁘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대범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이 중심의 연결선 상에서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권면의 말씀이 중심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사모하며 강해지기를 원하며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는 분별력을 구해도,
이것이 왜 구현이 잘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앞서 14절 말씀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특징이 있는데, 무엇이라 말씀드렸습니까?
모두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다. 다시 말해 극심한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다시 보면, 또 한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는 모두가 다 승리하는 자들인데, 그 승리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그 승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주님 보혈로 승리가 가능했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격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보혈로 승리하고, 십자가 은혜로 인한 인격을 자랑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구할 때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치열한 전투 속에 삶 같지만, 주님 의지하여 더 강해지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전장 속에 피는 꽃 같은 존재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