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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3월 13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사도신경

찬송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102,새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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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 5:20-21

은혜는 마음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어 감동을 받고 마음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거쳐 삶으로 나타나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주석에서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하나님 앞에 서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일까지 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은혜는 우리의 실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무력감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 은혜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은혜가 주는 감격이 단순히 이론적이고 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회복시켜주는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실제 삶을 변화시켜주는 에너지를 맛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이 여러분 삶을 견인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은혜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본문에서 은혜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표현이 지난주에 이어 또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입니다.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율법이 죄를 양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내 안에 들어와 왕노릇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에게, 율법은 그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계는 자각하게 하는 기능은 있지만, 치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건강검진이라 이해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몰랐던 것을 자각하게 하는 기능은 있지만,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은혜는 죄를 자각하게도 하지만, 그것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주며 살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감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탕자에 비유를 잘 아시듯,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은 염치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청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단숨에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줍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종으로라도 받아주시면 한이 없겠다는 아들에게,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의 은혜가 임했을 때,

둘째 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탕자의 비유에서 그 이후에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평생을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그림자만 보아도 눈물이 쏟아지는 감사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종으로라도 불러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그에게, 아들로 회복시켜주는 아버지 조건없는 사랑과 환대. 이것이 은혜입니다.

 

반면 이야기를 통해 큰 아들의 문제점도 보입니다.

큰 아들은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둘째와 달라.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한 적 없고, 가출도 안했고, 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보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큰 아들은 둘째를 폄하하고, 무시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큰 치명적인 문제는, 그것 때문에 매일 같이 화나 있는 것입니다.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신앙 초기에는 둘째 아들로 시작해서, 어느새 큰 아들처럼 신앙생활하고 있진 않습니까?

 

현대에 한국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에 참 마음이 아픕니다. 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난하고 험담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기존 교인입니다. 혹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다 교회를 떠난 부류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았던 부류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많이 하는 부류 중 초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처음 예수님 만났던 감격이 있습니까? 예수님 이름만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던 그 처음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래 전 기사 중 기억에 남는 기사의 제목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에 중독된 현대인’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억압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억지로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진 않습니까? 신앙생활 오래 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완벽해야하고, 직분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겉만 멀쩡한 신앙을 유지하려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 보시기에 초신자나 오래 예수님 믿은 자나 차이가 있을까요?

또 신학적으로 초신자면 우리 내면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아직은 해결하지 못하고, 오래 신앙생활 했다면, 해결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도록 날마다 선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은혜가 진정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우리 내면의 부끄러움, 수치가 열등감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의욕이 회복되는 길로 바뀝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는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많은 사람을 만나주시고, 자신을 만나주셨다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열등감이 열등감에서 끝나지 않은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10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은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을 견인하는 힘은 ‘그러나’입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라 칭함 받기도 부끄럽고,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던 자. 그렇게 온통 열등감에 자격이 없는데, 은혜를 주셨고,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았던 바울의 감격과 감사의 고백.

그럼에도 그러나 은혜를 주신 주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은혜는 죽으심으로 시작되었고,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날마나 참소하는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 주님께 온전하게 맡기면, 다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을 견인해 나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게 은혜가 여러분을 다스리도록 날마다 선포하십시오.

선포하실 때, 주님께서 날마다 여러분 삶을 담대한 생으로 이끌어 주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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