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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03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05월 03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사도신경

찬송 - 내가 참 의지하는 예수 (찬86, 새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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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 2:1~4

로마서 1장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었다면, 2장은 믿는 자들을 향한, 즉 유대인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자들을 견향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2장이 시작되면서, 유대인들의 여러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열거됩니다.

이렇게 수없이 열거되는 유대인들의 문제점들 중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무엇인가 보면,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많은 문제점들 중에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이것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관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의문을 뒷받혀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 생각보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심각하게, 무게 있게 다루어야 할 것임을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1장 29절부터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떠난 인생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열거되는데, 수많은 것들 중 ‘수근수근, 비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근 거림과 남을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들여다보니 역시나 똑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경고는, 은혜를 받으면 그 누구보다 은혜스럽고 고상한 존재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한 존재가 될 위험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까 또한, 목회자의 목회자다움, 직분자의 직분자다움은 개인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은혜의 힘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공급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며, 유대인들이 비판하고 정죄한 것 자체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이사야 56장 10절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여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백성들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있는데, 지도자들이 눈이 어두워 꾸짖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 것을 놓고, 정말 무섭게 벙어리 개들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판과 지적자체를 금지하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호도하여 잘못된 권위를 세우는 것에 남용하거나, 남을 정죄하는 것에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비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건강한 비판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비판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습니다.

누구라서 평생 옳은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실족하고, 넘어지고, 다른 길로 가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는 건강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 역시 오늘 본문에서 옳은 길 가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비판으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판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병든 비판, 즉 남을 꺾고, 넘어뜨리기로 작정한 비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건강한 비판을 해주는 이웃이 있습니까?

먼저 상대방을 일으켜 세워주며, 성장케 하는 건강한 비판을 해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건강한 비판이며, 무엇이 병든 비판인지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병든 비판은

1. 교만이나 우월감으로 하는 비판입니다.

1장에 나오는 ‘판단하다’는 원어로 법정용어입니다. 마치 내가 심판자가 되어 상대방을 향해 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택함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아주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민족 외에 이방인들은 인간이하 취급을 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을 향하여 ‘쓸데없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왜 만드셨을까? 아! 하나님이 지옥 불쏘시개감으로 만들어놓으셨구나!’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 은혜로 이방인들과 함께 신앙을 이어가니, 자연스럽게 교만과 우월감이 깃든 비판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아픔입니다.

이러한 교만과 우월감,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는 직분자일수록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왜 이런 류의 비판이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는지 보면, 업신여기며 하는 비판이요.

 

그러니까 남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닌, 우월감 교만으로 하는 비판이 위험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내로남불 비판입니다.

즉, 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비판입니다.

본문 1절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에 대한 판단은 정확한데, 본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역시 타인에 대하여는 칼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적용치 않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결점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르나르

 

정말 맞는 말 아닙니까?

익숙한 결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보이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항상 비판이 나올 때,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자신에게 적용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에게만 적용하여 비판하는 것이 왜 위험합니까?

 

하나님 진노하심은 3번의 내버려두사로 진행됨을 1장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시고, 죽을 고생을 하게 해서라도 제 자리로 돌려놓으신다면, 절대 저주가 아닌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타락하고 거짓을 행하여도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결국에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고난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어떤 분이 어떤 사고로 크게 다쳤고, 이 상황을 놓고 함께 기도하며 빠르게 회복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면,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애초에 그러한 고난을 주시지 않으시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에 하시는 걸까요?

병주고 약주는 분이 하나님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주변을 둘러보면 참 많이 보입니다. 또 직접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지혜롭게 그러한 고난들을 맞이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고난을 통한 ‘내버려두지 않으심’에 대한 하나님 말씀, 경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지혜로운 삶은 2장으로 넘어와 주변의 고난을 바라보며 내 교훈으로 삼는 인생입니다.

 

본문에서 지적하는 유대인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타락을 보면서, 비판은 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적용한 잣대를 나에게는 적용치 못한 인생의 어리석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할 수만 있다면 ‘내버려두지 않는’ 인생으로,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님 뜻하신 바를 깨닫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비판은

1. 긍휼의 정신이 깃든 비판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현장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사’가 모두 붙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마태복음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치유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모든 기적의 동력에는 ‘불쌍히 여기사’가 있었습니다.

 

복음 되신 예수님 정신 이것이라면, 우리 역시 상대방을 대할 때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불쌍히 여기사는 원어의 의미에 좀 더 가깝게 직역하면 ‘함께 고통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대방을 비판할 때, 상대방의 이탈, 넘어짐, 고통을 함께 느끼며 다가가는 것이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에 이런 건강한 비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비판 이전에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비판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 상대방을 깨우치고 살리기 위한 비판

바울은 2장에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왜요? 2절에 보니까,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대로 내버려두면, 방치하면 하나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절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유대인의 비판이 다른 결정적인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방치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애절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깨우치고 살리기 위해 엎드리는 합정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병든 비판을 알았고, 건강한 비판을 알았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을 보면 길이 보입니다.

바울만큼 병든 비판자가 없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예수 믿는 자들을 비판하고, 잡아가두고 죽였던 자가 어떻게 이토록 내버려두면 죽을까 걱정하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답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임했던 하나님 은혜가 바울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 자신의 인격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힘으로 바꾼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온 힘. 능력. 은혜로 바울은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그리고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으로는 안 되고, 내 인격으로, 내 힘으로는 남을 넘어뜨리는 비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건강한 비판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깨우치고 살리는 데에까지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날마다 선한 것 하나 없는 우리 내면을 다 열어 주께 드리며, 내 안의 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안으시며 할 수 있도록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서시길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주님 마음이 부어지는 여러분 생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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